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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낙천【安土樂天】예기(禮記) 애공문(哀公問)에 “안토(安土)하지 못하면 낙천(樂天)하지 못하고, 낙천하지 못하면 완전한 인격을 이룰 수가 없다.” 하였는데, 명(明) 나라 왕정상(王廷相)은 신언(愼言) 작성편(作聖篇)에서 “어디에 있든 편안한 것을 안토라 하고, 어떤 일을 하든 편안한 것을 낙천이라 한다.” 하였다. 안토중천【安土重遷】고향을 떠나기를 싫어한다. 안평군【安平君】전단이 연 나라 군사를 물리친 뒤에 받은 봉호(封號)이다. 안평원【顔平原】평원은 안진경(顔眞卿)의 봉호(封號). 안풍리【安豐吏】조세(租稅)를 독촉하는 관리. 당(唐)의 동소남(董召南)이 안풍(安豐)에 살았었는데 당시 자사(刺史)가 그의 현행(賢行)을 천자(天子)에게 추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록(爵祿)은 그에게 오지 않고 날마다 관리가 문 밖에 와서 조세만을 독촉하였음. 《小學 外篇 韓文公 董生行》 안하단류구【岸下斷類姤】구괘(姤卦)는 위 5획은 모두 연하였고 아래 한 획만이 끊겨 있다. 이것은 가파른 언덕의 모양이 마치 구괘처럼 아래가 딱 끊긴 것을 말한 것으로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에 “앞에 가로 놓인 것은 박괘(剝卦)와 같기도 하고 뒤가 끊긴 것은 구괘와 같기도 하다.[或前橫若剝 或後斷若姤]"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안하무인【眼下無人】눈 앞에 사람이 없는 듯이 말하고 행동함. 태도가 몹시 거만하여 남을 사람 같이 대하지 않음을 말한다. 안한공【安漢公】전한(前漢) 시대 왕망(王莽)의 봉호임. 왕망이 한때 한(漢)을 찬탈하여 자칭 황제가 되었으나, 뒤에 다시 한 나라의 중흥(中興)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안합착배【顔闔鑿坏】안합(顔闔)은 노(魯) 나라 처사(處士)인데, 임금이 억지로 불러서 사자(使者)가 문으로 들어오니 그는 뒷담을 뚫고 도망하였다. 안항【顔巷】안자누항(顔子陋巷)의 준말로 궁벽한 시골살이를 말함. 공자(孔子)의 제자인 안연(顔淵)은 벼슬하지 않고 시골에 있어 집이 매우 가난했으므로 빈궁한 것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한 대바구니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먹으며 궁벽한 시골에서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顔回)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다.” 하였음. 안항【雁行】안항은 기러기떼가 하늘을 날 때의 가지런한 줄을 말함. 주로 형제간의 뜻으로 인용함. 조정의 반열. 안행【雁行】기러기는 나란히 떼지어 날아가기 때문에 형제간의 행렬과 같다 하여 형제간을 안행(雁行)이라 한다. 안행면기【安行勉企】편안히 행함은 자연스럽게 행함을 말니 바로 성인의 일이고, 힘써 행함은 노력하는 것으로 보통 사람의 일임. 《中庸 二十章》 안현【安玹】안현은 중종(中宗)이 말년에 숙환으로 고생할 때 승지로 있으면서 의약(醫藥)에 밝아서 항상 시종하였다. 그 뒤 명종조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안현시혈상반반【鞍峴詩血尙斑斑】신증동국여지승람 제49권 안변도호부 조(安邊都護府條)에,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 한 남자가 북녘의 장성(長城)의 사역장으로 갈 때 그의 아내가 임신중이었는데,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쌀을 지고 가는 한 남자를 만나 고향이 어디인가를 물으니,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이에 마침내 서로 붙들고서 통곡하면서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내어 부자(父子)의 형상을 바윗돌에 그리고는 함께 죽었다. 이에 이곳에다 장사지냈다.’ 한다.” 하였다. 안현은 안변도호부의 서곡현(瑞谷縣) 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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